외교성과 세일즈포인트는 ‘국민 설득’
권력을 앞세워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도 한다.
그나마 근대화를 위한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이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눈에는 단지 왕실을 위한 작업으로 비추었다.미국·러시아와의 외교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조청수륙무역장정을 맺도록 강요하였다.함께 해석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김옥균의 생각은 루쉰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미국·러시아가 도울 수 없는 상황 중국이 전통적 관계를 깨고 스스로 제국이 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조선 내에서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 근대화의 길이 아니었다.
문제는 근대적 지식인들이 일본의 근대화가 민주주의적 개혁의 길이 아닌 군국주의의 길이라는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단지 두 조약 간의 차이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강화도 조약에는 없는데.
사태를 악화시킨 청의 개입 청에는 책임이 없었는가? 동아시아에는 수백 년 동안 조공관계가 지속하였다.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무엇보다도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는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이렇게 구한말의 역사는 하나의 원인에만 책임을 돌리기에는 너무나 복잡했다.